남한산성 가는길에
팔당호 변
연초록 새옷을 갈아잎는 사월의 산
삼전도의 수치를 찾아서
남한산성에 올랐다,
복원된 성곽들
산성은 그날의 치욕을 아는듯 모르는듯
선조들의 상흔이 서린 성곽은 산허리를 둘러 섯고
계곡은 하냥 푸르러만 가는 농익은 봄날
새로 짓고 보수하는 산성의 절터
1636년 인조 14년인 병자년 12월 초에 청 태종은 직접 12만의 군사로 조선을 침략하는 병자호란을 일으킨다. 조선은 청군을 맞아 결사항전을 했지만, 전황이 불리해져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계속한다.
1637년 1월 초엔 청의 12만 대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했으며, 조정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척화파와 최명길 등의 화의를 하자는 주화파로 분쟁하게 된다.그 사이 청 군에 의해 강화도로 피신했던 세손과 왕자들이 모두 잡히자, 결국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로 나아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한다.
청은 청은 조선에 다음과 같은 강화조건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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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를 지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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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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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장자 및 제2자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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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예에 따라 사절을 보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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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병 요청에 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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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이 귀환할 때 병선(兵船) 50척을 제공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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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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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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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소 재 지 | 서울 송파구 석촌동 28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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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강화조건의 결과로 소현세자와 부인강씨, 봉림대군과 부인 장씨와 김상헌 등의 신하들이 청나라 선양으로 압송되었다.
1639년 인조 17년 삼전도비를 세운다.
1640년 인조 18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반청론자인 임경업을 수장으로 수군 6천명을 파견했으나, 청조의 책망을 받고 돌아오고, 임경업은 1644년 명에 투항한다.
1645년 청나라에 볼모로 억류되었던 소현세자가 귀국하나, 귀국 후 2개월만에 석연치 않은 죽음을 당하고, 부인 강씨는 사약으로 죽었으며,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