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임진왜란의 본거지 오사카 성

남강 2012. 7. 25. 11:20

(히데요시란 자가 만든 조선침략 의 본거지 오사카 성)

간단히 인터넷 지식창을 빌면

 

1592(선조 25)~98년에 2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일어난 난리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조선과 명(明)나라의 군사가 연합하여 물리친 전면적인 국제전쟁이었다. 임진년에 처음 발생했다 하여 보통 '임진왜란'이라고 하며, '7년전쟁'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1597년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만을 따로 언급할 때는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부른다. 그외 임진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게이초[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이라고 한다.

 

이곳이 임진왜랸의 본거지인 오사카 성이다,

어릴적엔 이 성의 그림옆서를 보고 얼마나 황홀했던지

일본에 대한 환상을 가졌던 기억으로

지금 생각하면 실소를 금할수 없다,

 

성 둘레에는 해자가 이중으로 되어 있어 육안으로 보아도

칼잡이 시대에는 쉽사리 정복하기 힘들도록 조성되어 있고

석양에 비친 모습은 지금이야 현대식 건물이 들어차 있으나

그당시의 모습으론 들판에 자리한 한폭의 그림이 아닐수 없었겠다,

 

그러나!

 이 성의 근본인 피의 역사를 생각해 볼때 히데요시의 원귀가 해자를 따라 싸고 도는 형국이다

 

해자는 조선 침략이 실패로 끝나고

오른팔이던 도꾸가와 의 야심으로부터

사후 에 닥칠 아들의 명운을 지키기 위해 설치 했으나

아무리 탄탄한 요새라 한들 그것이 잃어버린 정치권력 앞에

무슨 소용이 있더란 말인가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호시탐탐 때를 기다리던

도쿄에 기반을 둔 도꾸가와 가

호랑이 없는 무주공산 을 그냥 놓아둘리 없었으니

새끼 승냥이가 대호가 되기전에 속히 도륙해야 했을터

이놈들의 문화는 배신과 호전성의 문화 답게

사꾸라에 걸맞는 이중적 음흉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현대에 들어 울나라 여행사 가이드 다수가

이런 껄끄러운 역사적 사실을 왜곡 회피하며

단순히 히데요시와 도꾸가와 두사람에 얼킨 사유만 늘어놓고

우리나라 관광객들을 미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허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니

이해는 가나  공감 할수없는 안타까운 일이다.

 

멀리 해자밖에서 본 오사카 성 전경

 

 

 

차에서 내려 오사카 성내로 발길을 옮겨본다

성의 유레를 잘아는 한국인이라면

착잡한 감회가 어찌 들지 않으리요.

 

 

필자옆 좌측에 딸애

그 옆 검은 썬그라스 분이 우리 일행을 안내하는 가이드 아줌마

 

사십대 후반이라는 이분 제나라 역사는 모르면서도 일본역사는 줄줄이 끼는데

재담이 여간아닌 일본 가이드 경력 20년 이란다,

그래서 인지 왜색짙은데 본색은 토종 한국이라면서

일본 칭찬이 여간 아니다.

 

그러나 일본은 더 이상 우리의 우상도

경제 사회 문화에서 경쟁 상대도 아님을

아직 모르고 있는것 같아  실망스럽

 

흙으로 메꾸어서 외곽에서 성으로 연결된 길을 따라 가보니

 

꾸며놓은 솜씨가 매우 정성스럽다,

제것이 소중하면 남의것도 소중한 법인데

남에게 민페를 절대 안끼친다는 국민성을 강조하는 가이드

그런데 왜 우리나라엔 그렇게 모질게도 조상대대로 노략질을 하면서

수천년을 내리 해악을 행했을까 ,

 

가이드 말로는 두살때부터 무릅을 꿇고 저희끼리 수저를 들고 밥을 먹게 한다나

그래서 예의와 자기절제가 철저한 국민성을 지녔다나 모래나,,,

 

그래! 우린 너무나 사랑스럽게 키워서 애들 버릇이 없다 그말이렷다.

그래서 일본 애들이 울나라 애들을 보면 사족을 못쓰고 한류라 하냐?

 

지금은 튀어야 살고 튀어야 현재와 미래를 경영할수 있는 첨단산업시대란다,

아임씨요 무시칸 티내세효?

 

일본 예찬론을 늘어 놓는 가이드 말을 들으면 심사가 뒤틀리는데

이 글을 통해 한국인의 정서도 좀 알아줬으면 싶다,

그러고도 한국인이라고 일인들앞에 당당하게 나설수나 있겠는지,

 

 

강열한 햇볕탓에 사진마져 어두워지고

단정하게 정돈된 공원길을 지나

 

 

성문이 저앞인데

멀리서 봐도 건물은 일품이다

히데요시란 자가 밉긴해도

 

 

 

 

 

저놈의 축벽은 미살로 갈겨도 소용없겠다 싶은데

무너진 권력엔 무인지경이나 뭐가 다른건지

히데요시의 잔머리로도 제 사후 아들놈을 지키내질 못했으니

어리석은 놈이 제패망은 모르고 언감 스승국인 조선을 침탈했으니,,,

 

히데요시가 죽고 나자

도쿄에 자릴틀고 앉았던 도꾸가와는 이 기회를 놓칠새라

핑계를 대고 명분을 만들어

아들놈을 곧바로 도륙을 내고

히데요시 일족의 씨를 말려 버렸단다,

 

수많은 생명을 해코지 한죄로

하늘의 진노를 사서 급사해버린 저주의 살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곳은 또 길옆에 위치한 일인들의 귀신집 이름하여 신사다.

얘네들은 오나가나 귀신집을 곳곳에 지어놓고

귀신을 불러 들인다

 

야 쪽발씨들아!

귀신이란 위하면 위할수록 저만 위해달라고 자꾸만 들붙는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무시칸 훈도시들 헐헐헐~~~

 

 

성문은 없고 왠 쪽문?

그러나 이문이 정문이란다,

 

 

해자는 사진으로만 보면 얕게 보이나

실물은 깊이가 족히 십미터 이상은 보이고

세월흔적으로 많이 메워 졌겟으나

당시 칼잡이들로써는 도무지 넘을수 없는 난공불낙이었겠다,

 

그러나 무너진 권력앞에 태산인들 무인지경이 아니던가

철옹성이 무슨 소용이랴,

단숨에 짓밟이는 한낮 티끌이 아니던가,

 

 

 

 

엄청난 석벽들

그럼에도 단숨에 해장거리로 일족이 깡그리 멸족을 당한 성벽은 옛그대로 역사를 말해주고

 

 

문안으로 갖들어와 주변을 다시한번 정리해본다,

 

휘돌아 오르는 길옆에 성채가 보이고

 

너른 길을 조금지나

 

 

거의 안마당에 당도해보니

 

 

왜인들로써는 자랑할만한 미려한 성의 본모습이 클로즈업 되어 온다

 

 

무더운 폭서에도 석양은 기울고

수목은 무성하여

성의 미감을 더해주는데

두번의 소실을 거치고도 근자에 복원되었다는 저 성이 되살아난 것은 저 아름다움을 지역민들이 잊지 못했음이 아닐런지

그러나 세월의 흔적이 없는 것은 한갖 전시물일뿐

차라리 해자에 연해있는 축벽만도 못한 것을~~

 

 

 

 

족히 수백년은 돼 보임직한 저 괴목

천벌을 받은 대살수 히데요시도 저나무를 보았을까?

 

 

 

 

 

 

 

결국 히데요시는 여기에서 조선침략을 논하고

임진왜란 을 일으켜서 처음에 승승장구 하는듯 하다가

심기일전한 조선 이순신으로 부터 결국 패전의 소식으로

심장통이 터지는 고통을 겪다가 급사하게 되고

제가 키운 가신 도꾸가와 이에야스로 부터

 아들대에서 완전멸족이 되는 천벌을 받게 된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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