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한시는 벽계수라는 선비가 있는데 그가 스스로 절조높은 선비라 칭하며 화류장화 보기를 우습게 안다하는 소문이 있기로 이에 황진이가 그를 한번 꺽어볼량으로 그가 잘다닌다는 청산리로 찾아가 밝은 달아래 정자에 나앉아 풍류를 잡히고 그를 빗대어 이 한시를 �은즉 그가 휘엉청 밝은달로 산책길에서 난데없이 아름다운 시조가락에 자신을 지칭하는 이 한시를 접하고 기이히 여겨 누대에 올라본즉 드믄미색의 황진이를 보고 그의 재주에 탄복하여 그에게 자신을 놓고 말았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것을 필자가 어릴적에 들었던바
인터상에 다른뜻으로 풀어쓴글과 대조를 이루기로 이글을 서두에 올려두는 바이다,
이 묘소는 원주시 문막읍에 소재한 것으로 그의 자손들이 여러번 옮겨와서 현재의 장소에 모셔진 것으로 본 블러그에 상재하는 바이다,
그의 자손들의 말을 빌리면
그 시대에 벽계수 선비는 절개곧은 선비로 황진이 음심에 희생이 되신 어른이라며
기생 황진이 를 화류잡기로 평하는 것을 그대로 옮겨 놓아봄.

문막산 정상아래 흐드러진 야생화

묘소로 가는 길




진달래 조팝 이 어우러진 벽계수 묘소입구



세종대왕 증손 벽계수 묘소





오랜세월의 흔적이 느껴져 옛것으로 추정되는 묘소한켠에 그대로 놓여있는 상석




참고: 황진이
조선 중종대 개성의 기생, 시조시인.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3절(松都三絶)이라 일컫는다.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 황진사의 서녀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가 되었다.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영구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한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 모든 이의 칭송을 들었고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성격이 활달해 남자와 같았으며,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 30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나, 서경덕이 처사(處士)로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험 하다가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서경덕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안주를 가지고 자주 화담정사를 방문해 담론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보기를 원했으나 황진이는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지 않아 친구 이달에게 의논했다. 이달은 "진이의 집을 지나 누(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한 곡을 타면 진이가 곁에 와 앉을 것이다. 그때 본 체 만 체하고 일어나 말을 타고 가면 진이가 따라올 것이나 다리를 지나도록 돌아보지 말라"하고 일렀다. 벽계수는 그의 말대로 한 곡을 타고 다리로 향했다. 황진이가 이때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라는 시조를 읊었다. 이것을 들은 벽계수는 다리목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다 말에서 떨어졌다. 황진이는 웃으며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風流郞)이다"라고 하며 돌아가버렸다고 한다.
소세양이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나는 30일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황진이와 만나 30일을 살고 이별하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 〈송별소양곡 送別蘇陽谷〉을 지어주자 감동하여 애초의 장담을 꺾고 다시 머물렀다고 한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을 같이 살고 헤어졌다.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죽을 때 곡을 하지 말고 고악(鼓樂)으로 전송해달라, 산에 묻지 말고 큰 길에 묻어달라, 관도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게 하라는 등의 유언을 했다는 야담도 전한다. 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부임하는 도중 황진이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면서 지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가 전한다. 그녀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로 시작하는 시조를 포함해 모두 8수가량의 시조를 남겼고 〈별김경원 別金慶元〉·〈영반월 詠半月〉·〈송별소양곡〉·〈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박연 朴淵〉·〈송도 松都〉 등의 한시를 남겼다. 〈식소록 識小錄〉·〈어우야담〉·〈송도기이 松都紀異〉·〈금계필담 錦溪筆談〉·〈동국시화휘성 東國詩話彙成〉·〈중경지 中京誌〉·〈조야휘언 朝野彙言〉 등의 문헌에 황진이에 관한 일화가 실려 전한다.
황진이의 또다른 일화가 있다.
이를 옮겨적어보면 아래와 같이 윗글과 약간은 다른 설을 살펴볼수 가 있는데 현대인들이
그당시의 정황을 보다 정확히 살펴 기록할수는 없겠으나 전해내려오는 여러가설들을 볼때
이만 하면 당대 박연폭포 서경덕과 함께 송도삼절 이라 칭하는 명기 황진이 의 이름에 손색이 없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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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생. 중종 때 진사(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相思病)으로 죽자 기계(妓界)에 투신, 문인(文人) ·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修道)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天馬山) 지족암(知足庵)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破戒)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師弟關係)를 맺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詩作)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愛情觀)을 표현했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시조이다. 서경덕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滿月臺懷古詩)》《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봉별소양곡시(奉別蘇陽谷詩)》《영초월시(咏初月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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